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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

by 지며리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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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에르케고르는 니체와 함께 실존철학의 기초를 다진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독일의 관념론은 구체적인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의 목적은 철학이 개인의 문제를 다루어 구체적인 현존재가 핵심인 실존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혼전 임신의 불행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며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갑자기 부를 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와의 결혼은 아버지의 재혼이었는데,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던 친척이었습니다. 혼전 임신을 죄악으로 여기던 당시에 어머니는 키에르케고르의 형을 임신한 채 결혼하는데, 이 일은 그의 가족에게 두고두고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 뒤 부모님은 5남매를 더 두어 7남매가 되지만 동생들은 모두 일찍 죽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의 아버지는 고통과 죄의식으로 괴로워했고, 키에르케고르도 그의 가정이 신의 버림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죄의식과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보면서 아버지와의 갈등과 불화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 뒤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레기나 사건

 

1830년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지만 곧 흥미를 잃습니다. 당시에는 신학에서 합리주의가 우세를 보였는데, 이런 신학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당시 유행하던 헤겔 철학을 수용하기보다 헤겔을 공부해 그와 대결하고자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대학에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열중하면서, 한때 대단한 사교 솜씨를 보였지만, 183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1840년 키에르케고르 3년 전에 만나서 기다려 온 17세 레기나 올센과 약혼을 합니다. 그러나 1년 뒤에 파혼을 합니다. 이 사건은 그가 자신을 얼마나 저주받은 운명이라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파혼의 이유는 자신처럼 저주받은 사람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을 때까지 레기나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간직하면서,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때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교회와의 마찰

 

한때 키에르케고르는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셸링의 강의를 듣지만 형편없는 잔소리꾼이라고 비난하면서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저술과 일기 쓰기에 열중합니다. 그는 저서 대부분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는데, 독자가 키에르케고르라는 저자의 권위보다는 독자의 고유한 능력으로 책을 읽어 가도록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 뒤 그는 목사가 되고자 했으나, 교회의 주교를 비판한 이유로 격렬한 논쟁에 말려들어 포기해야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의 잘못된 교회와 그릇된 신앙의 문제점을 그의 철학적 주제로 깊이 다루면서 그리스도교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런 비판을 통해서 절망을 넘어서는 보다 경건한 실존적 신앙을 위해 고민했지만,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실존철학

 

20세기 철학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갖는 본질적인 문제는 실존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어떻게 신과 관계를 맺는가였습니다. 이 문제를 통해 한 개인으로서 구체적인 실존이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이며, 그에 의하면 독일 관념론은 이 문제를 철학적 사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추상적인 사색가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합니다. 인간을 영원한 시각에서 보는 추상적인 사고는 실존하는 것의 구체성, 유한, 발전 과정을 보지 못함으로써 그 자신이 구체적인 존재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모습이 됩니다. 이러한 추상적인 존재와 내용 없는 사고는 결국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주관적인 사고는 곧 인식하는 사람과 그가 새롭게 얻은 인식이 직접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인식하는 사람에게 절대적인 관심사는 현실로서 거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함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내가 나에게 가장 구체적인 현실이며, 이 사실이 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큰 의미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무한과 유한, 필연과 자유의 종합이지만 이것은 정확한 답은 아닙니다. 인간의 실존이란 이처럼 단순한 개념적 종합이 아니라 사유하고, 욕구하고, 느끼면서 행위하는 나라는 자기로서, 스스로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를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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